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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편지와 반 고흐의 일기

기사승인 2024.03.17  00: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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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프랑크라는 이름을 우리는 어린이 문학 도서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다. 반 고흐 역시 친숙한 이름이다. 미술 시간에 고흐를 배우고 백화점에 걸린 해바라기, 이 두 사람은 언제부터 알았는지도 모를 만큼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을 안다고 종종 착각한다.

다락방에 숨은 어린아이라던가 정신병에 괴로워하던 예술가 같은 수식어만으로 이들을 온전히 소개할 수 없다. 나는 이들을 글로 다시 읽고자 한다. 한 사람이 쓴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기대 안네의 일기장을, 고흐의 편지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안네

 

 

안네는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 안네 가족은 독일에서 탈출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했으나 1940년에 독일은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가족은 언니 마르고를 수용소로 투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그해 여름 은신처로 몸을 숨겼다. 가족은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지냈으나 결국 발각되었고, 안네는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안네는 은신처에서의 삶을 일기장에 담아 왔다. 프랑크 가족이 체포된 이후 안네의 일기는 이전부터 가족을 도와 왔던 미프 기스가 보관했고, 해방 이후 안네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에게 전달했다. 처음 출판된 안네의 일기는 오토 프랑크가 일부 편집한 것이었지만 현재는 제외됐던 부분과 추가로 복원된 부분이 함께 전해진다.

 

나는 계속 살고 싶어. 내가 죽은 다음에까지 말이야. 그래서 신에게 아주 감사하고 있어.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 하고, 또 그것을 위해 정진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엄마 배속에서부터 갖고 태어나도록 해주었으니까.

1944년 4월 5일 수요일

 

짜깁기 되지 않은 안네의 일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잘 썼다. 안네의 글은 어린아이가 끄적인 것이기에는 표현도 뛰어나고 완결성도 있다. 안네는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읽었다. 아이 같으면서도 때로는 어른스러운, 그 언어 자체에서 오는 울림이 있다. 안네가 쓴 것은 일기만은 아니었으며, 은신처에서 생활하는 동안 두세 편의 소설을 써서 은신처 사람들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안네에 따르면, 은신처 사람들도 안네가 읽어주는 이야기들을 재밌어했다고 한다.

안네는 작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분명히 자신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때도 있었다. 한 번은 도저히 무슨 생각으로 그런 글을 썼는지 모르겠다며, 다시는 그런 창피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안네는 항상 솔직했고, 자신이 철학을 논하는 게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말하면서도 쓰고 또 썼다. 부족한 내가 싫은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싶다. 실패하는 게 무섭고, 마감은 계속 미루고, 그냥 한 번에 잘해버리고 싶은 나한테. 나는 한 번 이런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게 왜 실패하는 거야, 그냥 그 과정에 도전하는 거지. 그냥 더 나아가는 과정에 네가 하나 있는 거야.’ 내가 스물둘에 배운 걸 안네는 열넷부터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여기서 무엇을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끌려간 사람들을 생각해야만 하는 걸까? 뭔가 즐거운 일이 있어서 웃음이 터지더라도 금세 소스라치며 웃음을 멈추어야 하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즐거워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자책하면서 말이야.

1942년 11월 20일 금요일

 

안네는 일기에서 한넬리를 자주 언급했다. 안네는 한넬리와 절친한 사이였다. 둘은 유치원 때부터 서로를 알아 왔고, 한넬리는 안네가 생일날 일기장을 선물 받는 모습을 본 사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안네가 은신처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갈라졌는데 안네는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걸 계속 후회하면서 친구를 위해 기도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딛고 행복해도 되는가? 한때는 아프리카에 사는 굶주린 아이들을 생각하라고 듣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쁨 삼지 말라고 배워 왔다. 안네의 일기에서 이런 고민에 대한 나름의 통찰력을 볼 수 있다. 안네가 찾은 답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연에 기대는 것이었다. 안네의 어머니는 안네에게 가끔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감사하라 했지만, 안네는 바보 같은 조언이라고 말했다. ‘나라면 다르게 충고하겠어. 이런 햇살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존재하고 내가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 한, 그것이 가능한 한, 어떤 괴로움에도 분명 위안이 다가올 거야.’

안네는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죽은 줄 알았던 한넬리와 다시 만났다. 한넬리는 해방 이후 이스라엘에서 간호사가 되었는데, 이스라엘에 정착한 이후로도 오토 프랑크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고, 자신은 평생 나치의 만행을 알렸다. 안네가 한넬리의 몫까지 살고자 했던 것처럼, 한넬리도 안네의 몫까지 살아가고자 했다.

 

즉 나쁜 안네를 밖으로 하고 좋은 안네를 다시 안으로 넣어버리는 거야. 그런 상태로 계속 방법을 갈구하는 거야, 내가 되고 싶은 안네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을. 만약, 만약에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이 한 명도 없어진다면, 과연 그때는 가능해질까?

1944년 8월 1일 화요일

 

안네를 알았던 사람들은 안네가 불같은 면이 있었다고 했다. 고집불통에 건방지다고. 안네는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어머니와의 갈등도 심해서 한때 엄마에 대해 조금의 애정도 남아 있지 않다고까지 적기도 했는데, 오토 프랑크가 첫 안네의 일기를 출판할 때 제외했던 것이 이런 부분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착하게 살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고 너 자신에게 엄격해지라고.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다른 사람 때문에 피해를 보면 화부터 나기도 하고,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지만 가끔은 가십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 정치인도 범죄자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마당에 나의 잘못은 작은 것이라고 말해보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가끔 나는 왜 이 모양일지 생각할 때, 그때 안네의 글이 다르게 읽힌다. 질투, 분노, 우울, 못되고 유치한 생각들. 우리는 사실 닮았으니깐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안네가 어쭙잖게 다른 사람을 위로 삼지 말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안네는 자신을 비춰 보고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툴 때는 순간 분노하다가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기도 하고, 가끔은 참아주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갔다. 그 마음을 닮고자 한다.

 

 

반 고흐

 

 

고흐가 남긴 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은 모두 고흐가 정신병을 앓는 10년 사이에 창작되었다. 이전에는 교사로 일하기도 했고, 선교사가 되기도 했다. 익히 알려진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고흐가 한때 선교사였다는 사실이 의외로 느껴지기도 한다. 고흐는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주 그만두거나 해고되었고, 1880년에 남동생 테오의 제안에 따라 화가가 되었다.

고흐는 가족이나 친구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현재 전해지는 편지 903통 중 600통 이상이 테오에게 보낸 것이다. 테오가 쓴 답장에는 언제나 고흐에 대한 걱정과 응원이 담겨 있다. 어쩌면 고흐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그와 그의 그림들을 사랑했던 건 테오 뿐이었던 듯하다. 고흐의 편지들은 고흐의 사망 이후 테오의 부인이었던 요한나 반 고흐-봉허가 처음 서간집으로 출판했다.

 

곧 더 자세히 쓰겠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을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속에서도 차분함을 느낀다. 위험의 한가운데 안전한 곳이 있는 법이지. 우리에게 뭔가 시도할 용기가 없다면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니?

1881년 12월 말

 

우리는 자주 너무 늦은 건 아닐지, 나의 능력이 부족하지는 않을지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고흐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고흐는 27세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시작한 시점이 늦었다. 게다가 고흐는 색약이었다. 고흐 특유의 강렬한 색채는 어쩌면 고흐가 색을 그만큼 잘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세상이 마냥 호락호락하지 않은 건 확실하다. 노력은 가끔 나를 배신하고, 악재는 겹쳐서 일어나고, 고흐의 삶은 계속해서 좌절되지 않았는가.

그럼 고흐를 나아가게 했던 힘은 어디서 왔을까? 고흐의 작품은 보통 광기와 엮여 소개될 때가 많지만 고흐의 글은 그가 그림에 있어 얼마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고흐는 늘 예술가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논했고, 자신에게 어떤 연습이 더 필요한지를 고찰했다. 고흐는 그림에서 충동적이었던 적이 없다. 오히려 모든 그림에 기다림을 반복했다. 그것이 고흐를 나아가게 했던 힘이다. 기다림. 그래서 테오는 아들에게 고흐의 이름을 주었다. 우리는 아기가 언제나 형처럼 끈기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어.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니.

1888년 9월 3일

 

고흐가 자신의 그림 중 가장 아꼈던 것은 「감자 먹는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아꼈는지 편지에서도 「감자 먹는 사람들」을 여러 번 언급한다. 테오에게 이 그림의 가치를 두 페이지 넘게 설명하고, 세상도 언젠가 이 그림의 진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적은 고흐가, 나는 조금은 귀엽게 읽힌다.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손이라고 한다. 정직한 노동으로 얻은 식사를 맞이하는 농부들의 손.

고흐는 사람을 대하는 일에는 항상 서툴렀다. 부모님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고, 사랑에도 여러 번 실패했다. 하지만 고흐는 항상 따듯한 눈으로 사람들을 읽었던 듯하다. 고흐의 꿈은 그림이라기보다는 기억이었다. 그림의 형식을 빌려, 살아 있는 기억을 남기는 일. 우리 세상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다. 고흐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평민들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았고, 「감자 먹는 사람들」 외에도 평민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여럿 남겼다. 위대한 삶이 있는 게 아니라 삶이 위대하다.

 

자네가 편지에 내 그림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걸 갖고 싶다고 썼더군. 자네에게 작약 그림이 있고 코스트에게 접시꽃 그림이 있다면 나에겐 해바라기 그림이 있지…이른 시일에 자네 편지를 받아볼 수 있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네. 우리는 늘 친구라는 사실 잊지 말게.

1889년 1월 22일

 

고흐는 고갱을 매우 좋아했다. 둘은 아를에서 함께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고흐는 집을 따듯하게 만들겠다며 해바라기를 그렸고, 고흐의 상징과 같은 해바라기 그림이 이즈음 여럿 그려졌다.

고흐와 고갱이 항상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고흐가 고갱과 심한 다툼 이후 스스로 한쪽 귀를 잘랐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고 나서도 둘은 연락은 계속 주고받았는데, 이후에 고흐가 고갱에게 보냈던 첫 편지는 평소 주고받았던 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의 글이 그것이다. 싸우고 다시 화해한다. 우정은 울퉁불퉁하다.

어쩌면 오랜 우정이 더 단단한 이유는 그 시간 안에 수많은 갈등이 지나서인지도 모르겠다.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고갱이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갖고 싶다고 하자 고흐는 투덜댔지만, 얼마 지나서 똑같은 그림을 그려 주었다. 고흐가 언급한 것만 계산해도 고갱은 고흐의 해바라기를 셋이나 갖고 있었다. 고갱에게는 테오마저도 고흐에게 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둘은 예술가로서의 서로를 이해했고, 예술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몇 없는 친구였다. 둘은 작업 스타일도, 삶의 방식도 너무나 달랐지만, 그 다름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안네와 고흐 이후에

나는 작년에 고흐를 처음 알았다. 이렇게 적으면 몰상식해 보일까. 물론 나도 고흐가 누군지 알았다. 하지만 고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이야기를 고흐에게 들은 건 꽤 최근의 일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고흐의 그림을 보는 감상이 달랐다. 나는 예술 작품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낀 게 처음이었다. 예쁘다는 생각은 종종 했지만, 아름답다는 건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벅차면서도 둥근 마음이었다.

나는 고흐를 한 번도 알았던 적이 없구나. 별안간 안네가 떠올랐다. 안네 또한 많은 오해 속에 있는 인물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서, 이참에 무언가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안네를 또 처음 읽으면서, 글자 뒤에 있는 삶을 읽었다. 고흐와 안네는 누가 만들어 낸 가짜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이 둘은 차마 하나의 이야기로는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생애 속의 한 사람이었다.

세상은 더 이상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꼭 글이어야 하는 이유가 없어졌다. 사진 하나로 영상 하나로 이야기를 쓰고 심지어는 세상에 없는 걸 그려낼 수도 있다. 그런 세상에서 글은 가끔 과거의 유적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계속 글을 쓰는 이유를 묻는다면, 글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라 하겠다. 가끔 적지 않고 버틸 수 없는 날들이 있다. 세상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끔은 또 엉망진창이어서 글자로 옮긴다. 글은 많은 걸 잠재우는 힘이 있다. 안네와 고흐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이들도 분명 글을 쓰는 동안에는 덜 외롭고 덜 흔들렸을 것이다.

정반대의 이미지로 알려졌지만, 사실 안네와 고흐는 많이 닮았다. 자신의 시대를 온 마음을 다해 살아간 사람으로서, 둘은 자신의 꿈을 사랑했고, 안네는 작가가 되고 싶었으며 고흐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안네의 글 중 이런 게 있다. ‘작가라는 직업을 갖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일에 종사하는 틈틈이 글쓰기는 결코 손에서 놓지 않을 거야. 나는 부자가 아니야. 나는 예쁘지도 않아.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영리하지도 않지만, 난 행복해. 앞으로도 행복해지고 싶어!’ 수년에 걸친 이들의 글에 항상 꿈이 있다. 나는 항상 부족하고, 항상 실수하고, 하지만 또 노력하고 화폭을 논하고 글을 쓴다. 그 떨리는 마음이 읽힌다. 안네는 우울할 때는 비참한 현실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세상에 남아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고, 지평선을 보면서 희망을 얻는다고 적었다. 고흐에게도 자연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었다. 고흐는 자연 그 자체에서 나온 언어가 있다고 했다. 그 언어를 어떻게 화폭으로 옮길지 고민하고 많은 작품으로 남겼다. 이 둘은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던 세상을, 더 아프게 사랑했던 듯하다.

그래서 안네를 읽으면 고흐가 보이고, 고흐를 읽으면 안네가 보인다. 그리고 이 둘은 백 년도 지난 지금을 살아가는 너와 나와도 닮았다고 나는 감히 이야기한다. 안네와 고흐는 사실 너무나 평범하게 살았다. 둘은 성인도 아니었고 광인도 아니었다. 그저 이 지구를 한때 디뎠던 사람으로서 때로는 아끼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증오와 사랑을 느끼고,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서고, 마지막까지 존재의 의미를 고민했던 한 사람이었다. 그 평범함에서 위로를 얻는다.

 

 

정휘진 challenzy@gmail.com

<저작권자 © 홍익대교지편집위원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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