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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말하다. 광주시립미술관 김준기 관장

기사승인 2024.03.16  22: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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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 관장님 약력>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학·석·박사

『계간 가나아트』, 『월간 가나아트』 편집부 기자

가나아트갤러리 환경조형팀장, 공공미술팀장

사비나 미술관 학예실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국큐레이터협회장

광주시립미술관 관장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동 대학원 예술학과 석·박사를 졸업하신 김준기 관장님은 편집부 기자에서부터 큐레이터, 미술관 관장까지 다양한 길을 깊이 있게 걸어오셨다. 광주시립미술관의 관장을 맡으신 지 한 해가 지난 지금, <와우>는 관장님을 다시 홍익대학교로 모셔보았다. 관장님의 오랜 미술계 생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김준기 정신을 생생하게 들어보자!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현재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관장을 맡고 있는 김준기입니다. 저는 1968년 강원도 평창에서 4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평창에서 쭉 자라다가 국민학교 5학년을 마치고 이후에는 부산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때 서양화과를 가고자 준비했었는데, 공부를 너무 잘하는 바람에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시험을 치게 되었습니다. (웃음) 그때가 1987년으로 예술학과가 처음 개설되던 해였는데 예술학과는 공부를 여간 잘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더라고요. 재수 때 더 열심히 준비하여 예술학과 88학번으로 입학을 하였습니다.

 

당시 홍익대학교는 어땠나요? 관장님의 대학 생활이 궁금합니다.

1988년이면 아직 민주화가 완성되지 않았던 시점입니다. 한창 한국 사회 전체에 민주화 운동의 열풍이 있었고 학교 안에서는 학원 민주화가 있었죠. 그래서 시위가 참 많았습니다. 이후 군대를 갔다 오니 한국 사회가 많이 변화되어 있더라고요. 대통령도 바뀌어 있고 절차적인 민주화도 많이 진행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데모하다 붙잡혀 가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던 혼란스럽고도 엄혹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과는 달리 홍익대학교 근처에서는 ‘언더그라운드’라는 클럽을 필두로 수많은 록(rock) 카페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고 있었던 것이죠. 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 학생이었지만, 정체성은 소리얼 학과 기타리스트였습니다. (웃음) 남들이 미술 운동을 한다고 그럴 때, 저는 노래 동아리 소리얼에서 노래 운동을 했습니다. 당시를 생각해 보면······. 저는 큰 고통을 받지 않고 즐겁게만 대학 생활을 한 것 같아 그 시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학부 수업 때는 미학, 미술사, 예술학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고, 대학원을 가고자 한다면 세부 분야를 선택하여 진학합니다. 관장님께서 석·박사를 하실 때, 특별히 예술학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미학은 너무 관념적인 세계라고 생각했고 또 미술사는 미학이나 예술학처럼 학문이라기보다는 사학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술사는 역사 그 자체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공부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죠. 저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 사회변혁과 예술의 관계에 관심이 있어 예술학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예술학과는 예술심리학과 예술사회학 두 분야로 나뉘었는데, 예술심리학이 예술의 내재적인 원리들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면 예술사회학은 예술 바깥의 관계에 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조금 더 관심이 있어 예술사회학을 선택했습니다.

 

관장님께서는 예술비평에 관한 칼럼을 작성하신 적 있습니다. 관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예술비평에 대해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습니다.

본래 예술비평이라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작품을 하나의 텍스트로 놓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이는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내재적인 접근법에 가깝습니다. 그 예술작품 안에 무엇이 담겨 있고, 어떤 형식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작품 자체에 즉해서 끌어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술은 작품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바깥과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예술이 창작된 시대, 그 작품이 향유되는 시대 또 시간뿐만이 아니라 공간별로도 중요하죠. 그래서 저는 예술작품이 어떤 공간에서 창작되고 얽히는가를 종합적으로 보는 것이 예술비평에 있어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미술 내에서만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 현실적 관점, 역사적 관점 등 다양한 관점이 중요한 것이지요.

 

관장님께서는 ‘한국 큐레이터 열전’이라는 이름으로, 큐레이터를 소개하는 칼럼을 현재까지 쓰고 계세요. 큐레이터의 전기를 담은 칼럼을 쓰신 계기가 있나요?

작가들을 소개하는 글은 많은데 큐레이터를 소개하는 글은 별로 없으니, 큐레이터의 가치를 드러내는 글을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정에서 검사와 판사가 하는 일을 미술관 안에서는 큐레이터가 다 합니다. 어떤 작품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작가를 선택할 것인가. 또 이 작품을 수집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들은 모두 큐레이터의 결정력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큐레이터는 미술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체이지요. 그러나 큐레이터의 인식과 가치평가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칼럼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큐레이터 자신도 자신들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서 자기 점검을 더 치열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이 칼럼을 쓸 때마다 하는 인터뷰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OOO 큐레이터 정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럼, 큐레이터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저는 칼럼을 통해 이 사람의 정체성과 여태까지 해왔던 것들의 관련성을 판단하여 글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관장님이 생각하시는 미술의 역할에 대해서도 궁금해지네요.

작품을 생산하는 것은 한 사람입니다. 공동작업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주체 한 명이 작품 하나를 생산하죠. 그런 점에서 미술의 출발점은 개인이고 미술 감상의 완결도 개인입니다. 그러나 미술은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백성 ‘민(民)’자는 사람의 눈을 바늘로 찔러 놓은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다수가 노비였고 소수가 지배자였기 때문에, 백성 ‘민’은 지배계층이 피지배자인 노예의 눈을 바늘로 찔러놓고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배자의 관점으로만 좁혀져 있던 공론장을, 근대사회에서는 다수의 논의와 합의로 변화시켜 냈습니다. 여기서 ‘공공성’이라는 것은 하버마스가 언급한 우리가 모두 알고 공유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이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큰 요소가 바로 언론과 예술입니다. 예술은 개인이 창작하고 개인이 감상하는 것이지만, 개인들의 생각과 감정들이 합쳐져 공공의 영역인 공론장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예술은 공적인 공론의 장입니다. 20세기를 지나면서 미술은 상당히 사적인 코드 즉, 개인적 감상 정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공공미술을 통해, 공공성을 새로 회복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의 공공성을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으신가요?

현재 미술 문화가 폐쇄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술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미술의 언어에 갇혀 미술에만 한정된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그들만의 리그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죠. 그런 점에서 예술이 공공성을 확보하게 된다면 예술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훨씬 잘 전달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즉, 공공미술은 미술의 자폐적인 언어에만 갇혀있는 것이 아닌 사회를 향해 열린 개방적인 공론장으로서 작동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죠. 그게 제가 기대하는 바입니다.

 

관장님은 예술가는 예술 제도의 권력과 공간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자율적인 존재라고 말씀하신 적 있어요.

예술가에게는 자율성이라는 특권적인 지위가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전위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술가 스스로가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자율성’일 거예요. 근대 시기 전까지 예술가는 주문받은 것을 생산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예술은 예술가에게 자율성을 부여했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의 지위를 얻은 것이죠. 그런 점에서 예술가가 미술 권력이나 제도에 맞추어 산다면 지금 당장은 달콤하고 맛있어 보이겠지만, 궁극적으로 예술가의 본질과는 맞지 않을 것입니다.

 

관장님께서는 여러 갤러리, 미술관에서 일을 하셨어요. 각 기관에서 일을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활동이 있나요?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가 있죠. 제가 전부 말해드릴 수는 없어서 제가 거쳐온 각 기관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볼게요. 우선, 가나아트갤러리가 기억나네요. 가나아트센터 갤러리가 처음 개관할 때 개관 기념전으로 권진규, 박생광, 장욱진 세 거장의 전시를 했었어요. 이제 막 30대 초반의 전시기획자로서 거장들의 전시를 하느라 상당한 긴장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사비나 미술관에서의 에피소드도 있었죠. 제가 사비나 미술관에서 일할 당시, 사비나 미술관은 갤러리에서 미술관으로 전환된 초창기 미술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별화된 기획이 필요했지요. 이 시절에는 사립미술관도 공적인 영역에 포함되는 공공재라는 목소리를 많이 냈습니다. 자립형 미술관 네트워크라는 활동을 통해, 여러 사립미술관과 사립미술관 지원 제도를 위한 활동을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일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은 워낙 방대하고 큰 미술관이어서 어마어마한 에피소드가 많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우리나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서 그 규모와 명성에 따라 끊임없는 혁신이 필요한 곳입니다. 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했던 2년이라는 기간 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닌 문제점 모두를 해결하고 혁신하기란 쉽지 않았죠. 저는 지금도 국립현대미술관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과학도시의 특성을 살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일을 했던 것, 인터내셔널이 아닌 도시와 도시 간의 인터시티가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내었던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등이 기억에 남네요.

 

관장님께서 큐레이터 정신을 강조하시는 만큼, 저 역시 전시기획에 큐레이터 개인의 색채가 뚜렷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무적 성격을 지닌 국공립 미술관의 경우 큐레이터의 이념을 적절히 배제할 필요도 있을 것 같은데요, 관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개인의 관심과 이념이 없다면 그것은 큐레이터의 정신이 투여된 것이 아니죠. 큐레이터의 정신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큐레이터 열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어떤 정신을 갖고 있고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강력한 관심 분야와 신념, 또 그것을 넘어선 이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공립미술관이 큐레이터 개인의 이념을 실현하고 펼치는 장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니란 말이에요. 각 미술관이 지닌 목표가 무엇인가, 그 기관의 미지 목표는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것에 부합하는 개인 큐레이터의 정체성 방향과 신념이 잘 맞아야 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전시기획뿐 아니라 연구, 소장품, 교육 등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로서는 10여 년 전에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과 분단의 현실을 반영한 미술품 전시를 기획하면서 갈등을 겪은 적 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분단사회가 가지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문화예술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많은 예술가가 정부의 억압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기도 했고요. 그때 저도 국제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의 조사를 2시간가량 받았었는데, 안기부 측에서도 저의 전시 의도를 이해했는지 크게 사건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에 이상하게 제 일이 잘 풀리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보니 제가 미술인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무원인 내가 블랙리스트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절의 저의 신념, 이념들이 현 정권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부딪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큐레이터가 자기 이념을 갖지 않고 산다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저는 사회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제 신념을 꾸준히 유지하였습니다.

다행히도 현재 제가 관장을 맡고 있는 광주시립미술관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이야기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제 개인의 관심 분야와 이념에 맞는 이야기를 잘 펼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큐레이터는 자신의 신념과 잘 맞는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광주와 광주시립미술관이 관장님의 이념과 잘 맞는 장소라는 것이 상당히 흥미롭네요. 그런 점에서, 광주라는 도시의 지역성이 예술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광주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민주 인권입니다. 이는 광주의 어떤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든 민주 인권을 빼놓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민주 인권은 역시 예술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1980년에 광주항쟁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독재의 문제, 민주화라고 하는 독재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획득하겠다는 시대의 과제를 혁명적인 사건으로 분출해 냈죠. 그러나 광주항쟁은 짓밟히고 맙니다. 사람들은 학살당하고, 감옥에 가고, 다치거나 병들어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죽음과 고통의 헌신을 딛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이룩했죠. 이후 민주주의를 향해 점진적으로 진화해 나갈 수 있는 발걸음을 광주가 했어요. 그래서 광주 정신은 민주 인권, 평화입니다. 실제로 광주의 많은 예술가들이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그렇기에 광주는 도시 정체성과 그것이 엮어내는 지역성이 예술과 공존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광주시립미술관의, 광주비엔날레의 전시, 수집, 교육, 연구 방향에 있어 관장님께서 바라시는 점이 있나요?

광주 정신이라는 것을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뭇 생명의 문제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광주 정신이 민주 인권 평화가 아닌, 민주 인권 ‘생명’ 평화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것을 파편화시켜 이야기하자면 기후 위기의 문제, 젠더의 문제 등 여러 주제로 펼쳐나갈 수 있겠지만, 큰 틀에서는 뭇사람의 문제와 뭇 생명의 문제를 더 큰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겠죠. 그렇다면 우리 사유의 틀은 사람의 문제에서 생명의 문제로, 생명의 문제에서 우주의 문제로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과 우주라고 하는 큰 틀의 사유와 실천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미학적인 이야기나 감각적인 이야기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 정서 속에서도 뭇 생명의 가치와 이상을 발견해 내는 것. 그것이 저희의 과제입니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중외공원이라는 큰 공원을 끼고 있는데, 저희는 공원 전체를 생태미술관으로 만드는 일을 계획 중입니다. 생태적 가치를 지닌 미술관으로 자리 잡고, 민주 인권 생명 평화 도시를 이뤄나가는 시립미술관의 역할을 다하려고 합니다. 또한, 광주 비엔날레는 광주항쟁의 정신을 문화적으로 연결하고 예술적으로 승화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비엔날레입니다. 지속해서 광주비엔날레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의 이념이 묻어있는 비엔날레가 되도록 정체성을 확장해 나가고자 합니다.

 

관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오늘날 문화·예술산업은 어떠한가요?

현재 문화산업이나 예술산업은 돈을 벌어야 하므로 미디어와 결합해 큰 대중적 파급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산업적 가치는 크지만, 예술적 가치는 떨어진다는 우려가 존재하죠.

노래를 예시로 들자면, 저는 기본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자기 언어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대다수의 가수는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가사를 작성하고 사람들이 듣기 좋은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죠. 방송에 나와 사랑 노래, 이별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을 보면······. 정말 재주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와 저 사람의 삶이 어떤 관계가 있을지를 생각하면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대다수이죠. 물론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형식적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만 좋아서는 예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예술이 예술표현을 하는 사람의 자기 언어, 자기 생각을 발진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을 수용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산업적 가치에 의한 예술에만 좇아가는 것이 아닌 예술에 대한 각자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갖고 수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미술계, 미술관에 대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시장과 비시장이 너무 이원화 되어있어서 돈 벌겠다는 사람은 돈만 생각하고, 미술만 보는 사람은 미술만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술계가 시장과 비시장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미술과 사회가 관계 맺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지당한 일인데, 그것에 대해 경계를 두고 이데올로기에 가로막혀 편협한 시각으로 미술을 바라보는 경우들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미술만큼 힘이 센 매체가 드묾에도 불구하고, 우리 미술계가 너무 주눅 들어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미술계가 시민사회와 함께 미술 문화를 넓게 나누는 길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미술관이 미술 박물관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술관은 미술관이 아니라, 미술 ‘박물관’입니다. 박물관 고유의 문화기관으로서 이상과 이념, 목표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잊지 않고 생각하여 미술관이 박물관다운 박물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미술관이 무슨 작품을 소장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장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의 국립 미술관은 갈 길이 멀죠. 한국 국립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이잖아요. 그러면 근대 미술은 어디로 갔나? 근대 미술에 관한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립근대미술관이 바로 서야 국립현대미술관도 현대미술관의 이름값을 할 수 있을 텐데, 지금 그렇지 않은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소장품과 연구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관성이 떨어지고 큐레이터 개인의 관심 수준에만 머무는 전시들이 많이 양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관은 소장품과 연구 기반의 큰 전략을 통해 박물관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다양한 꿈과 잠재력을 가진 홍익대학교 학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홍익대학교는 요즘 어떤 학교인가요? (웃음) 저는 홍익대학교가 다른 대학교에 비해 더 잘 노는 학교, 감성적으로 뛰어난 학교인 것 같거든요. 신촌 근방에 있는 다른 학교들보다 홍대 사람들은 왠지 좀 잘 놀고 감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장점으로 잘 살렸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공부로, 점수로 실력을 발휘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얼마나 감성적으로 풍요로운가, 감각적으로 얼마나 열려있는가가 이 시대의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감성적인 영역이 뛰어난 홍익대학교의 이미지를 잘 살려 자유롭고 창의적인 학생들로 살아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예술학도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우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시는 김준기 관장님을 만나보았다. 관장님께서 역설하신 ‘OOO 정신’은 비단 큐레이터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정신처럼 보인다. 또한 모든 생명을 포용하는 정신은 삶의 가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감각적인 홍익대학교 학우들이 다양한 사태들을 받아들이고 표출해 낼 수 있기를. 작은 지구 안에서 사람들이 당당히 자신의 이념을 뚜렷이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지구 안 모든 생명을 포용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마친다.

 

 

최봄이, 문정윤 hic245023@gmail.com

<저작권자 © 홍익대교지편집위원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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